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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좌/My Thought

신은 들을 수 없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는가?

엉클창 2023. 10. 2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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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시험과 기적

 

그리스도의 시험은 그냥 평범한 인간적인 시험이 아닙니다. 배가 고플 때, 기적을 행하는 것을 우리는 대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플 때, 단지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한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믿을 수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시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40일을 주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오병이어를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떡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때, 마귀는 40일을 굶으셨던 주님께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맙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서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으니라 하시니”(마 4:1-4)

 

주님은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지 않나요? 하지만 그런 주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 순간에 기적의 힘을 이용하여 떡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얼마나 초인적인 고통입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 왜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나요?

여러분은 주님이 작은 떡덩이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믿지 않나요? 그런데도, 40일을 주리셨던 주님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셨을 때, 그들은 크리스천이 되었나요? 요한복음은 부정적입니다.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이 다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 6:66-67)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기적은 믿음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기적을 보고도 그 사람들은 다 떠났으나, 오늘날은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에게 기적은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날 사도바울이 채찍질을 당하고 감옥에 던져집니다.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2-26)

 

순수한 인간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과합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를 위해서는 그런 기적은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런 채찍질을 당하지 않는 것은 더 좋고요. 기독교가 조금 더 멋있고, 고상하고, 공격적이지 않고, 안전한 입장에서 선포될 수는 없는 걸까요?”

 

아,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사도이며, 그는 일용할 양식조차 거의 없습니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모든 고통과 공포를 뛰어넘는 고통과 공포임이 분명합니다. 계속해서 위험에 처하고, 곤경에 처하고, 궁핍에 처하고, 고통에 처하고, 조금의 확률(probability)도 계속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확률은 물고기에게 물이나 새에게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특히 지금같은 인공지능 시대는 모든 것은 전부 확률게임이지요. 

이런 식으로 모든 확률을 부정하는 것은 극한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치고 기진맥진한 그에게 죽음을 허락하십시오. 아니, 그러나 기독교는 그에게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절대적인 극도의 순간에, 그는 겁에 질려 다시 삶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에, 진실로 여기에, 기적의 도움이 존재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여, 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충분히 맞지만 그런 식으로 실천하는 것은 바퀴가 부러 지거나 끌려가서 4등분되는 것보다 더 나쁜 고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님께서 사역의 초기에 이미 이와 똑같은 고문을 일부러 당하셨다고 믿지 않나요? 40일을 주리시고도 전능한 분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고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왜 일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이것은 오히려 또 하나의 고통입니다. 주변 세계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조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 때문에 고통당할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오, 그는 아무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그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식으로 아무런 도움 없이 있지 않았나요? 어차피 전능한 분께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분은 극한의 상황에서 40일을 주리시면서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나 사도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과 관련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이 지상에서 주리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분은 거지꼴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세상의 주인되신 분께서 말입니다. 그때 아마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마 아닐 수 있습니다. 기적, 이것은 끔찍한 고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보십시오, 이것은 고문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무한한 뜻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먼저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해야 합니다. 두려운 작업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만큼 고통스럽게 철저하게 시험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문 중에 의사가 입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사가 실수하여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분께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고문을 받을 때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체력은 점점 줄어들고 죽음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전지전능한 존재만이 매 순간 완전히 새로운 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고통입니다. 사실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형언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일이기 때문에 사도에게는 항상 한 가지 부가되는 부담이 있습니다. 즉, 감사해야 할 의무, 무한한 은혜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굶주리면서도 감사해야 하다니!

그러나 한 가지는 사도에게 유보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우리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사도입니다. 진리의 도구가 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절대적으로, 죽어야만 하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당신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죽임을 당할 수 있도록 유쾌하고 사랑스럽게 자신을 내버리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때만 당신은 진정으로 기적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때만 주님께서 왜 40일을 주리셨지만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있었는지 진정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 그분께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기적만을 원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행합니다.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통변의 은사 등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한 여러 은사들을 활용하여 영적 권위를 누립니다. 그들의 기적을 보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도들처럼 고난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기적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기적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발전하고 성장했다는 것이지요. 초대 교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당했으며, 기적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오늘날 그런 핍박은 없어졌기에 기적 역시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기적은 인간의 이성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나 하는 이야기이고, 인간의 지식이 더 발전하면 할수록, 기적은 설명가능하고 더 이상 기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대하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고난을 제거하고 기적만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은사를 탐닉한 채, 기적을 베풀며 모든 찬사를 다 받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과 함께 기적을 제거하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당하는 고난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그 정도로 기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지식인들’입니다. 

 

https://youtu.be/qiRs7eXCnUA?si=StHdG0zrxZGzwm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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