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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 인문학

이성으로 납득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 무지와 뭐가 다른가? 본문

인문학 강좌/My Thought

이성으로 납득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 무지와 뭐가 다른가?

엉클창 2023. 10. 2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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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는 이 질문에 대해 전길남 박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분은 대한민국의 컴퓨터 과학자이십니다. 1982년 5월 15일 대한민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에 두 번째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나라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일명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전길남 박사는 예전에 방송에 출연하여 ‘창의성’이 언제 생기는지에 대해 대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창의성이란 불가능에 도전할 때 생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것, 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것에 도전할 때, 창의성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에 가명의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가 쓴 ⟪철학의 부스러기⟫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3장에 보면, 기독교의 진리는 절대적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절대적 역설이란 도저히 자신의 이성으로 발견할 수 없는 진리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설이란 표현의 모순을 말합니다. 예들 들어, 유치환 시인의 깃발에 등장하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에 해당됩니다. 소리가 없는데 어떻게 아우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모순이 발생했고 이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그런데 클리마쿠스는 기독교가 왜 절대적 역설인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나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관통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는 절대적 역설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얻기 위해 이해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 한, 기독교의 믿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절대적 역설에서 나오는 일부 단락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역설은 사고(생각)의 열정입니다. 역설 없는 사상가는 열정 없는 애인과 같습니다. 그냥 평범한 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열정의 궁극적인 상승작용은 언제나 자신의 파멸을 원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어떻든 간에 이 충돌이 자신의 파멸이 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 충돌을 원하는 것이 이해의 궁극적 열정입니다. 그때 바로 이것이 사고(생각)의 궁극적 역설입니다. 

 

사고(thought)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원하는 것

 

사고의 이런 열정은 근본적으로 사고 안에 어디든 현존합니다. 단독자가 생각할 때 자기 자신뿐이 아닌 한, 그의 사고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동일하게, 걷는 인간의 행위는 자연과학자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지속적인 추락(falling)입니다. 하지만 아침에 자신의 사무실로 한결같이 걸어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선한 시민은 이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의 진보는 매개(mediation)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추락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확고하게 곧장 앞으로 가고 있는 그가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이성으로 납득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 무지와 뭐가 다른가?”

 

여러분은 생각의 열정, 사고의 열정으로,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다가 역설을 만나 좌절한 사람과, 그냥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생각의 열정, 사고의 열정으로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을 끊임 없이 사유하다가, 그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무지’와 같은가요?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에 의하면, 역설을 만날 수 있는 조건, 절대적 역설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사고의 열정을 가진 사람만 절대적 역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금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기독교의 진리는 무지한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할 때만 그가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에 이를지는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까지만 설명하겠습니다.

 

https://youtu.be/praWvREIEio?si=XapD8GyHRIH_6M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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